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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자이야기

뉴턴, 프린키피아의 저자, 위대한 세계 3대 수학자

by 별별인 2023. 4.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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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작 뉴턴

1. 들어가며

     알라딘에서 프린키피아의 북펀드를 진행하여 참여하였습니다. 위대한 과학자이자 수학자인 뉴턴의 저서, 프린키피아. 드디어 한국어판으로 완역되어 나온다니 반가운 마음에 펀드를 참여하였네요. 항상 책은 모으기만 하고 있는데, 프린키피아는 소장욕구를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뉴턴. 세계 3대 수학자이자 고전물리학을 완성한 인물이죠.  위대한 수학자의 위대한 저작이 이제 완역된다니 좀 늦은 감은 있지만, 박병철 교수님의 버킷리스트 중에 하나가 프린키피아의 완역이라고 하셨습니다. 드디어 출간되었습니다.  9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이네요. 원래 3권으로 되어 있던 책을 한 권으로 묶어서 번역한 것이라 많이 두껍습니다. 표지에는 F=MC라는 유명한 물리학 식이 각인되어 있습니다. 디자인도 예쁘네요. 

뉴턴의 프린키이아 완역본 / 초판본 표지

     뉴턴은 프린키피아는 유클리드의 원론의 체계를 따라가고 있습니다. 기본적인 정의를 시작으로 몇 개의 공리를 제시하고정의와 공리들을 가지고 명제들을 정리해 나가는 방식으로 뉴턴은 만유인력의 법칙을 설명합니다. 처음에 뉴턴은 누구든지 이해할 수 있도록 쉽게 책을 쓰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훅에 의해 "광학"에 관한 저술이 심하게 비판을 받자. 뉴턴은 자신의 연구를 발표하는 것을 극도록 꺼리게 됩니다. 이후에도 훅은 뉴턴을 비판하게 되는데, 이런 비판들을 듣기 싫었던 뉴턴은 프린키피아를 저술하면서 기본적인 이해력이 되는 수준의 사람을 독자로 하여 글을 저술하게 됩니다. 

    프린키피아에서 뉴턴은 만유인력의 법칙을 설명합니다. 설명의 도구로 사용된 개념이 미적분학이었습니다. 뉴턴 자신이 유율법이라고 이름 붙인 방법을 통해서 갈릴레이가 발견한 지상에서의 운동의 법칙과 케플러가 발견한 천상에서의 운동의 법칙을 통합합니다.  뉴턴에게 시공간은 고정된 절대적인 형식과 틀이었습니다. 물론 현대 물리학에서 아인슈타인에 의해서 반박되어 버린 개념이지만, 17세기 당시 뉴턴의 발견은 혁명적인 발견이었습니다. 

  

2. 뉴턴의 생애

     아이작 뉴턴은 위대한 과학자 갈릴레이가 사망한 1642년 크리스마스에 영국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뉴턴이 태어나기고 2년 후 사망하였고, 어머니 역시 뉴턴이 3살 되던 해에 재혼을 해서 뉴턴은 외할머니의 손에서 자라게 됩니다. 조용한 시골마을에서 외할머니 손에서 자라던 뉴턴은 열 살 무렵에 재혼한 어머니가 다시 돌아옵니다. 

    열두 살 무렵에 뉴턴은 그랜섬에 있는 학교에 입학하게 됩니다. 14세기에 세워진 그래머 스쿨이라는 학교였고, 이 학교에서는 주로 라틴어 문법을 가르쳤습니다. 학교이름이 문법학교이니 그럴만했죠. 당시 유럽 학계에서 공식적으로 사용되던 국제언어가 라틴어였습니다.  중요한 연구들은 모두 라틴어로 쓰였습니다. 뉴턴은 이 학교에서 라틴어를 배운 것이 나중에 유럽전역에 자신의 연구업적을 알릴 수 있는 자산이 됩니다. 뉴턴은 그만큼 라틴어를 능숙하게 다루게 됩니다.  물론 이 당시 뉴턴은 수학은 혼자 공부했다고 합니다. 

   어린 시절 뉴턴은 공부에 열정을 쏟으면 남들보다 뛰어난 성과를 냈다고 합니다. 다만, 공부보다는 기계를 만드는데 더 관심이 많았다고 합니다. 온갖 연장을 다룰 수 있었고, 안식일에도 쉬지 않고 이상한 기계를 만드는데 몰두했다고 합니다.

뉴턴은 존 베이트가 지은 "자연과 기술의 신비"라는 책에서 큰 감명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 책에서 실재적인 실험과 숙련된 기술, 분석과 범주의 분류등의 자연과학을 연구하는 태도에 대해서 깊이 있게 인식하고 습관화하는 태도를 배웠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태도는 뉴턴의 연구노트에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뉴턴이 처음으로 연구한 대상은 해시계였습니다. 이후 태양의 움직임에 대한 뉴턴의 관심은 평생 동안 지속됩니다.  어린 시절 뉴턴은 사교적이지는 못했지만 승부욕이 강하고 말없이 생각에 잠겨있는 성격이었다고 합니다. 

   열일곱 살이 되던 해 뉴턴의 어머니는 뉴턴에게 농사꾼으로서의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해서 학교를 그만두고 양들을 돌보게 합니다. 하지만 뉴턴은 책을 좋아하고 탐독하기 시작합니다. 하인에게 모든 일을 맡기고 자신은 책들이 많은 약제사의 집에서 책을 읽으면서 시간을 보냅니다. 그 과정에서 양들이 탈출하여 나무를 망치고,  돼지가 옥수수밭을 엉망으로 만들어 벌금을 물기도 합니다. 뉴턴에게 이 시기는 참 힘든 시기였던 것 같습니다. 짜증이 늘어나고 딴생각에 빠지고 사람들과 논쟁만 벌이게 됩니다.  결국 보다 못한 큰아버지인 윌리엄과 스코크스 교장 선생님이 어머니를 설득하여 뉴턴을 다시 학교에 다니게 만들고 대학을 진학할 수 있게 합니다.

    뉴턴은 18세 되던 때 캐임브리지 트리니티 칼리지에 입학하게 됩니다. 당시 청교도의 본산인 캐임브리지 대학은 영국이 왕정복고가 이루어지던 시기라 상당히 어수선한 분위기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교과과정도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 윤리학,  수사학으로 시작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토론방법으로 끝났다고 합니다. 1661년경 캐임브리지 대학은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시대에 뒤떨어진 학문을 하는 곳으로 전락해 버린 상태였습니다.  이 시기 뉴턴은 대학에서 신플라톤주의 동아리에 가입하게 됩니다. 아리스토텔레서의 영향력을 몰아내고 좀 더 수학적인 플라톤의 사상에 끌리는 동아리였습니다. 그리고 이 동아리의 지도자는 루카스 수학 석좌교수인 아이작 배로였습니다. 아이작 베로는 이후 뉴턴의 재능을 알아보고 자신의 후임으로 삼게 됩니다. 이 시기 뉴턴은 데카르트의 사상을 상당히 흡수하고 수학과 기하학에 전념하게 됩니다. 그리고 신학과 연금술에도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뉴턴이 트리니티 칼리지를 졸업할 무렵 유럽에는 흑사병이 창궐하여 대학이 휴학을 하게 됩니다. 뉴턴은 고향마을로 내려와서 쉬게 되었습니다.  뉴턴은 고향마을로 돌아와 있던 3년이라는 시간 동안 수학과 물리학에 전념하게 됩니다.  미적분을 비롯하여 만유인력의 법칙을 이 시기에 발견하였습니다. 이 시기가 1666년 경입니다. 

    이후 뉴턴은 1667년 트리니티 칼리지의 특별 연구원으로 선출되어 대학으로 돌아옵니다. 1669년에는 스승인 아이작 배로 교수의 뒤를 이어서 수학 석좌교수를 맡게 됩니다.  대학에서 수업이 많지는 않았지만, 수업을 잘했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학생이 적어서 벽을 보고 수업을 한 적도 있다고 합니다. 

      1660년대는 뉴턴에게 가장 창조적인 시기였습니다. 수학과 광학에 대해서 상당한 경지에 도달하였고, 최고의 업적인 만유인력의 법칙도 발견하였으면, 미적분학을 발견한 시기였습니다. 하지만 뉴턴은 자신의 연구결과를 발표하는 것에는 상당히 꺼려했습니다. 비판받는 것을 싫어하는 성격과 이전에 발표했던 광학에 대한 글이 훅에 의해 대단히 강하게 비판받았던 것에 대한 조심스러움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뉴턴은 이 시기에 조용히 연구만 몰입했습니다. 

      1660년에 만들어진 왕립학회는 새로운 과학에 대하여 적극적인 학회였습니다. 1971년 뉴턴이 반사망원경을 발명하자. 이 학회는 여기에 상당하 큰 관심을 가지게 되고 뉴턴을 왕립학회 회원으로 추천하게 됩니다. 이후 뉴턴은 신학과 연금술에도 관심을 가지고 상당히 몰입하게 됩니다. 뉴턴은 거의 잠을 4시간 정도밖에 자지 않고 연구에 몰입하는 스타일이었다고 합니다. 1684년 무렵 헬리가 행성의 궤도에 관해 물었을 때 뉴턴이 타원이라고 즉각적으로 답을 내는 것을 보고 헬리는 뉴턴에게 어떻게 알았냐고 질문을 합니다.  여기에 뉴턴이 답하는 과정에서 뉴턴의 그간의 연구를 헬리가 알게 됩니다. 헬리는 이렇게 대단한 과학적 발견을 책으로 저술할 것을 뉴턴에게 제안합니다. 뉴턴은 망설였으나 헬리의 적극적인 제안과 출판에 관한 모든 업무를 맡아 주겠다는 제안에 "프린키피아"를 저술하게 됩니다. 위대한 과학 저작이 탄생하는 순간입니다. 

      뉴턴은 당시 코페르리쿠스의 태양중심설, 갈릴레이의 낙하운동과 투사체 운동, 케플러의 행성의 운동에 관한 3가지 법칙과 조수와 중력에 관한 운동, 데카르트의 직선 관성들을 엮어서 자신만의 만유인력 법칙을 완성해 냅니다.  드디어 1686년 프린키피아가 출간되게 됩니다. 

    뉴턴은 이후 영국의 정치상황과 맞물려서 조폐국장을 지내기도 합니다. 그 시기는 위조화폐문제가 골치였는데, 뉴턴은 이 문제를 해결합니다. 뉴턴이 조폐국에서 일하는 동안 윌리엄 첼로너라는 거물급 위조지폐범을 포함하여 28명의 위조지폐범을 교수대로 보내버립니다.

    1703년 훅이 사망한 후 뉴턴은 왕립학회의 회장으로 선출됩니다. 이 시기 왕립학회는 쇠퇴기를 맞이하고 있었는데, 뉴턴이 회장으로 선출된 후 20년 동안 왕립학회를 다시 재건하여 활발하게 활동을 시작하게 됩니다. 1725년 뉴턴은 건강 때문에 캔싱턴으로 이사를 하였습니다. 여기서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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