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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자이야기

히파티아, 마녀사냥 당한 최초의 여성수학자

by 별별인 2023. 4.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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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파티아

0. 들어가며

    인간의 지성이 종교적 광기에 희생당한 사례는 역사를 살펴보면 심심치 않게 등장합니다.  인간이 모르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두 가지 방향으로 반응을 합니다.  바로  호기심과 공포죠. 인류가 모르는 것에 대해 공포에 휩싸일 때, 집단 광기가 발동합니다. 

    중세 유럽의 수학은 이전 시대인 그리스 시대의 수학 비하면 초라하기 그지없었습니다.  종교와 신학이 지배하던 시대의 인간의 지성은 참혹할 만큼 더디게 발전하였습니다. 그리스 시대의 수학적 성과는 중세 유럽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수학은 인류 지성의 최고의 자리에서 계산을 위한 도구로 전락해 버린 것입니다. 인류의 지성이 마비되어 가기 시작한 지점에 한 뛰어난 여성 수학자가 있었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히파티아입니다. 

 

1. 알렉산드리아의 민주적인 학문 풍토

    마케도니아아 알렉산드리아 대왕은 유럽을 통합하고 이집트와 중동지방, 인도 일부까지를 아우르는 대 제국을 건설합니다. 이후 나일강 하류에 자신의 업적을 기념하는 알렉산드리아라는 도시를 만들고 이곳을 학문과 문화의 중심지로 만들었습니다.  이 시기 알렉산드리아의 도서관에는 고대 그리스 시대의 찬란한 문화적 유산과 학문적 성과들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었습니다. 

    히파티아는 이 도서관의 관장인 "테온"의 딸로 태어납니다. 고대 그리스 시대는 피타고라스가 그러했듯이 여성이 수학을 배우는 것에 대해서 편견이 없었습니다. 피타고라스 학파에서도 밀론의 딸이자 피타고라스의 부인인 테아노라는 여성 수학자가 존재하였습니다. 물론 역사상 온전히 기록되어 있는 최초의 여성 수학자는 히파티아라고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아무튼 18세기 근대 유럽에서 여성에게는 정규 교육의 기회도 주어지지 않아서, "르블랑"이라는 가명으로 활동했던 소피재르맹이라는 뛰어난 여성 수학자가 살았던 것에 비하면, 오히려 기원후 370년 정도에 태어난 히파티아가 살던 시기가 여성의 학문에 대한 접근이 더 자유로웠던 것만은 확실합니다. 

 

2. 히파티아, 학문의 여신으로 성장하다. 

    히파티아는 아버지인 테온의 영향으로 어렸을 때부터 알렉산드리아의 도서관에서 생활하면서 다양한 방면의 책들을 읽게 됩니다.  아버지인 테온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수학교수이면서 책임자였습니다.  그는 히파티아의 개인 교수이며, 선생이며, 친구였습니다. 테온이 가지고 있던 미와 수학 논리를 홍콩 강렬한 애정이 히파티아에게 고스란히 전수되었습니다. 

    당시 알렉산드리아는 세계적인 학문의 중심지였고, 모든 문명국가에서 학자들이 모여드는 세계의 중심이었습니다.  알렉산드리아의 도서관은 많은 학자들이 모여있던 곳이었고, 이곳에서 히파티아는 예술, 문학, 자연과학, 철학, 수학에 이르기까지 상당히 다양한 학문들을 접하였습니다.  물론 당시의 학문들이 지금의 개별 과학처럼 엄밀하게 그 경계가 나누어지던 시기는 아니었습니다. 점성학과 천문학이 통합되어 있던 시기였고, 철학과 수학도 같은 범주에서 사고되던 시기였습니다. 물론 테온은 히파티아에게 다양한 학문들을 가르쳐 주었고, 그중에는 당시 세계에 존재하던 모든 종교 체계도 포함되었습니다.  종교적인 부분에서 테온의 입장은 단호하였습니다.  "모든 형식적이고 독단적인 종교는 현혹시키는 것이어서 이성적인 사람이라면 이런 종교는 받아들이면 안 된다"는 입장을 가르쳤습니다.  "틀리게 생각하는 것이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것보다 낫다"라는 가르침도 히파티아게 주었습니다.  이러한 종교관은 나중에 히파티아가 기독교와 반목하게 되는 씨앗이 됩니다. 

    히파티아는 고등교육을 받기 위하여 외국여행을 하는데, 가는 곳마다 왕족처럼 대우를 하였다고 합니다. 10년 이상 여행을 하였다고도 하고 1년여 가량 여행을 하였다고 하는 것으로 봐서는 오랜 시간 여행을 하였으나 연속적으로 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그리고 그녀는 젊은 플루타르크와 그의 딸 아셀피제니아가 운영하는 아테네의 한 학교의 학생이었던 것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그녀는 여기서 수학자로서의 명성이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이후 알렉산드리아로 돌아왔을 때, 대학에서 수학과 철학을 가르치도록 초청을 받습니다.  그곳에서 그녀는 초청을 받아들여 강의와 연구를 하면서 생을 보내게 됩니다. 

  

3. 히파티아, 진리와 결혼한 학문의 여신

     히파티아는 인기 있는 선생님이었습니다.  그 시대의 훌륭한 학자들이 그녀의 강의를 듣고 집도 방문하면서 논쟁하고 같이 연구하였습니다.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에서 온 많은 학생들이 히파티아의 수업을 듣기 위해 몰려들었습니다.  그녀는 디오판토스의 "산술"을 중심으로 방정식 이론을 강의하고 기하학을 수업하기도 했습니다.  천체를 관측하여 행성의 괘도가 타원이라는 것을 추론하기도 합니다. "디오판토스의 천문학적 계산에 관하여", "아폴로니우스의 원추곡선에 관하여", 알마케스트에 대한 해설서, 유클리드에 관한 주석서 등을 저술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히파티아의 저서는 현재까지 전해지지 않아서 그녀의 연구가 어떠했는지는 추론할 수밖에 없습니다.  히파티아의 제자였던 시네시우스에 따르면  그녀는 천체를 관측하기 위한 도구도 직접 만들었다고 합니다. 

   뛰어난 미모와 지성을 겸비하고 있었던 히파티아는 플라톤의 정신과 아프로디테의 육신을 가진 사람으로 평가되었습니다.  수많은 왕자와 권력자들 당대의 뛰어난 지도자들이 그녀에게 청혼하였으나, "나는 진리와 결혼하였다"라고 하며 결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지낸 것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이 말을 히파티아가 실재했는 말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수학자이자 철학자이고 달변가이면서 뛰어난 교사이기도 한 히파티아는 당대에 수많은 추종자를 거 드린 사람이었습니다. 

 

4. 키릴로스 주교의 등장과 마녀사냥, 히파티아의 죽음

   313년 콘스탄티누스 1세는 밀라노 칙령을 통해서 기독교를 공인합니다. 이후의 로마의 국교로 자리 잡은 기독교는 다른 종교에 대해서 상당히 배타적인 종교였습니다. 

  이후 412년에 킬리로스 주교가 알렉산드리아의 주교가 됩니다. 당시 알렉산드리아는 유대교를 포함한 다양한 종교가 혼재되어 있었고, 히파티아는 "신플라톤주의"자였습니다.  과학적인 이상주의를 추구하고 있었던, 알렉산드리아의 도서관을 히파티아는 관리하고 있었습니다.  기독교인의 시작에서 이곳은 이단의 온상처럼 보였습니다. 당시의 이집트 집정관은 오레스테스였는데, 히파티아와는 친한 사이였고 합리적으로 도시를 통치하려고 하였습니다. 

   반면 킬릴로스 주교는 대단히 정치적인 인물이기도 했습니다. 알렉산드리아의 주교가 되고 나서 오레스테스를 개종시키고 자신의 통제하에 둠으로 인해서 알렉산드리아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싶었습니다. 킬릴로스는 대중을 선동하는 능력도 뛰어났습니다.  알렉산드리아에서 기독교를 제외한 사상을 몰아내게 되고 그 과정에서 가장 큰 걸림돌은 히파티아였습니다. 

    대중을 선동하여 히파티아가 알렉산드리아의 도서관으로 강의를 가는 마차를 공격하여 그녀를 끌어내리고 성소로 끌고 가서 죽여버리고는 화장시켜 버립니다. 그리고 도서관은 불타버립니다. 

  당시 마녀에 대해서는 살갗을 도려내서는 방법으로 죄를 묻는다는 교황의 칙령이 있었습니다. 히파티아는 굴껍데기를 이용하여 살갗이 다 도려내시고 불태워버리는 방법으로 죽여버렸습니다. 최초의 마녀사냥이었습니다. 

  히파티아 사후 유럽은 소위 중세의 암흑기라 불리는 시대로 접어들게 됩니다.

  2009년에 개봉된 "아고라"라는 영화는 히파티아의 생애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주인공이 참 연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드네요. 종교적 광기에 의해 희생된 고귀한 영혼을 잘 표현한 작품입니다. 한 번 보시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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