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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이야기

사법살인, 인혁당 재건위 사건-사법사상 암흑의 날 4월9일

by 별별인 2023. 4.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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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대 사회대에 있는 여정남 공원

0. 오늘을 추모하며

    우리나라의 현대사를 살펴보면 안타깝고 아픈 역사들이 참 많은 것 같습니다. 아마도 독재자에 저항하며 끊임없이 싸워온 역사이기 때문일 듯합니다. 해방과 전쟁, 이념에 의한 분단, 그 분단 상황을 자신의 이득을 위해 정략적으로 이용한 독재권력, 그 독재 권력에 맞서는 민중들의 싸움으로 기록되어 온 역사이기 때문에 참 많은 일들이 있었고, 그 과정에서 억울하게 희생되신 분들도 참 많았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4월에는 그런 아픈 역사들이 참 많습니다. 

   오늘 4월 9일도 그런 날들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1975년 박정희 정권에 의해 조작된 사건으로 대법원에서 사형선고 18시간 만에 사형집행이 되어 버린 사법살인이 일어난 날입니다.

   도예종, 서도원, 하재완, 이수병, 김용원, 우홍선, 송상진, 여정남  여덟 분의 열사님들을 추모합니다. 

   

  1972년 11월 유신 헌법으로 박정희는 영구집권을 꿈꾸게 됩니다. 북한의 김일성이 부러웠던 박정희는 헌법을 무리하게 바꾸고, 긴급조치등으로 본격적인 독재의 시대를 만들어 냅니다. 깨어있는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유신반대 운동이 격화되자 긴급조치를 9호까지 발동하고, 반정부 인사들을 중심으로 대규모 간첩단 사건을 조작하게 됩니다. 대표적인 것이 2차 인민혁명당재건위사건입니다. 인민혁명당재건위라 이름 붙인 단체에서 북한과 연계하여 국가전복음모를 꾸몄다는 죄목으로 대법원에서 8명에게 사형선고를 내리고 선고 후 만 하루도 안되어서 사형집행을 해버립니다. 재판과정에서도 제대로 된 변호도 못하게 하고 가족들의 면회도 제한시키면서 고문에 의한 자백만으로 8명의 목숨을 뺏어 가게 됩니다. 그날이 1975년 4월 9일입니다. 제네바에 본부를 둔 국제법학자 협회는 이날을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선포합니다.

1.1차 인민혁명당 사건

     '1차 인혁당 사건' 사건의 명칭에서 알 수 있듯 2차 인혁당 사건에는 뿌리가 되는 사건이 있습니다. 1964년 '1차 인혁당 사건'입니다.    5·16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는 1963년 12월 17일 대통령 취임 뒤 한일국교 정상화를 위한 한일회담을 추진했습니다. 여기에 식민 지배의 대가로 일본에서 차관을 받는다는 등의 내용이 포함될 것이라는 점이 알려지며 '굴욕적 외교'라는 반대 여론이 일었났습니다. 1964년 3월 23일 당시 공화당 의장이었던 김종필이 도쿄에서 오히라 외상을 만나 한일회담 일정에 합의한 사실이 알려졌습니다. 대학가를 중심으로 김종필의 즉시 귀국을 요구하며 수천여 명이 참여하는 시위가 일어나게 됩니다.  같은 해 6월 23일, 박정희 정권은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군대를 동원해 시위를 진압했습니다. 한 달여 만에 1120여 명이 검거되고 348명이 구속됐습니다. 이어 1964년 8월 14일, 당시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이 '1차 인혁당 사건'의 시발점이 되는 기자회견을 하며, "북괴의 지령을 받고 대규모 지하조직으로 국가 변란을 획책한 인민혁명당 사건을 적발했다"는 내용을 발표합니다. 이후 1차 인혁당 사건 피고인들은 3일 뒤인 17일 검찰에 송치됩니다. 당시 수사를 맡은 서울지방검찰청 공안부 검사 4명은 "증거 상으로는 도저히 기소할 수 없다"라며 기소를 거부합니다.  사건 담당 검사 중 이용훈, 김병리, 장원찬 등 3명은 사표까지 냅니다. 이에 김형욱은 당시 검찰총장 신직수를 만나 다시 한번 기소 압력을 가했습니다.  결국 피의자들은 검찰 기소에 의해 구속되게 됩니다. 이후 '피고인들이 중정에 의해 물고문과 전기 고문을 당했다'는 한국인권옹호협회장 박한상의 폭로가 있었고, 이에 검찰은 피고인 14명에 대한 소를 취하하고 나머지 인원에 대해 공소장 죄목을 '국가변란을 기도했다'는 국가보안법 위반에서 '북괴를 고무, 찬양했다'는 반공법 위반으로 변경하게 됩니다. 1965년 9월 21일 대법원은 검찰이 기소한 25명 중 도예종에게 징역 3년, 양훈우 등 6명에게 징역 1년, 김금수 등 6명에게 징역 1년, 집행유예 3년, 박현채 등 4명에게 징역 1년을 확정합니다. 이상이 1차 인민혁명당 사건입니다.

 

2. 2차 인민혁명당 사건의 전말

     사법사상 암흑의 날 소위 인혁당 재건위 사건은 2차 인혁당 사건으로 더 잘 알려져 있습니다. 74년 4월 25일 신직수 당시 중앙정보부장의 발표에 의하면 “북한의 지령을 받은 인민혁명당 재건위 조직이 민주청년학생 총연맹의 배후에서 학생시위를 조종하고 정부 전복과 노동자, 농민에 의한 정부 수립을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건은 명칭에서부터 많은 의혹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세칭 1차 인혁당 사건이 64년 8월 14일 중앙정보부(중정)를 통해 세상에 알려진 이후, 중정이 발표한 혐의를 뒷받침할 만한 증거를 찾지 못한 채 사건을 맡은 서울지검 공안부는 ‘기소할 가치가 없다.’는 판단을 내렸습니다. 증거부족으로 검사가 기소 거부를 해버린 인혁당을  ‘재건’하려 했다는 것이 말이 되지 않습니다.

    2차 인혁당 사건은 박정희 독재권력이 한국적 민주주의를 내세우면서 유신독재 시작한 지 2년을 맞는 시점에서 발표되었습니다. 대학가에서는 반 유신데모가 잇따르고 양심적인 언론인, 교수, 종교인, 재야인사들이 유신체제에 반대하는 개헌서명운동을 벌이는 등 유신체제에 대한 반발이 거세게 일어나고 있었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74년 4월 3일에 민청학련 사건이 터졌습니다. 이날 민청학련의 명의로 작성된 선언문이 각 대학가에 뿌려졌고 서울대를 비롯하여 이화여대와 성균관대 등 여러 대학에서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습니다. 이 날 유인물은 전국민주청년학생연맹(민청학련)이란 이름으로 뿌려졌습니다.

    이에 박정희 정권은 대학가의 반 유신활동을 억누르기 위해 4월 3일 당일 긴급조치 4호를 발동하여 민청학련과 관련된 모든 활동을 불법으로 규정·금지했습니다.  이런 일련의 반 유신독재권력에 대한 저항이 거세게 일어나는 과정에서 박정희를 정점으로 하는 유신체제는 민청학련의 배후로 인혁당 재건위를 지목하게 됩니다. 그 당시 인혁당 재건위와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된 사람은 무려 1천24명에 이르렀고, 그중에 253명이 구속되었습니다. 그중 인혁당 관련자 23명, 민청학련 관련자 27명을 포함하여 180명이 비상보통군법회의에 기소되게 됩니다.

    1975년 2월 17일, 국내외의 압력에 견디다 못한 박정권은 민청학련 사건 관련자 전원을 석방했지만 인혁당 관련자는 제외합니다. 그들은 74년 5월 27일 국가보안법, 반공법, 내란예비음모 등의 혐의로 기소되었고, 그 후 비상고등군법회의는 그들에게 사형과 무기, 징역 20년, 징역 15년 등 중형을 선고했습니다. 

    1975년 4월 8일, 대법원은 인혁당 관련자들의 상고를 기각하고 군법회의에서 내려진 중형을 원심 그대로 확정 판결하게 됩니다. 국제법학자협회는 이날을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선포합니다. 1975년 4월 9일, 사형선고를 받은 도예종, 서도원, 하재완, 이수병, 김용원, 우홍선, 송상진, 여정남 등 8명이 대법원 판결 18시간 만에 사형집행을 당하게 됩니다.

    시신들은 각각 시차를 두고 한 구씩 인도되었고, 경찰은 8구의 시신을 완력으로 탈취하기까지 합니다.  그때까지도 고문의 흔적이 역력한 시신은 가족들의 확인도 없이 화장하는 만행을 저지릅니다.  사형집행 소식은 이틀이 지난 후 언론에 보도됩니다. 1964년에 있었던 제1차 인혁당 사건은 이 수사를 맡았던 담당 검사가 도저히 기소할 가치가 없다고 이의를 제기하고 세 명의 검사가 사표를 제출하기까지 했던 근원적으로 조작사건이었습니다.

   박정희 정권은 10년이 지난 후 이 사건 관련자들을 다시 희생제물로 선택한 것입니다. 이들은 대부분 민민청, 통민청 등의 활동을 했던 혁신세력이었지만 이후 중요한 사회적 지위나 활동 없이 평범한 사회생활을 했고, 이름이 전혀 알려지지 않아 세간의 관심이 모아지지 않는 인물들이었습니다. 1974년 사건의 전모를 발표했던 신직수 중정부장은 1차 사건 당시 검찰총장이었으며, 수사를 총지휘한 이용택 중정 6 국장은 당시 5국의 대공과장으로 수사를 담당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칠곡 현대 공원에 있는 여덟분의 묘역

3. 국가 차원의 진상조사와 피해보상

      국가 차원의 진상조사는 1999년 12월 출범한 1기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이뤄졌습니다.  의문사위의 '인혁당 재건위 사건 조사결과'에 따른 사건 경위는 다음과 같습니다. 의문사위는 인혁당 재건위는 물론 당시 중정이 인혁당 재건위가 배후조종했다고 주장한 민청학련이라는 조직부터 실체가 없다고 했습니다.  근거로는 '민청학련은 유신반대 유인물에 붙일 명의를 논하다가 채택된 이름에 불과하다'는 관련자들의 진술과 '이 조직의 강령, 규약, 조직체계표 등 일체의 증거물이 없었다'는 점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수사 과정에는 강제 자백을 목적으로 한 고문이 있었습니다. 

    전창일 등 생존 피해자들은 당시 중정의 전기고문, 물고문, 구타 등을 증언했습니다. 고문 과정에서 수 차례 실신을 경험하거나 실명 등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은 이도 있었습니다.  사형된 하재완이 탈장으로 인한 고통을 호소했고, 온몸에 멍 자국이 있었다는 진술도 나왔습니다.  피고인들이 끝까지 혐의 내용을 부인하면, 당시 수사팀장 윤모 씨의 지시에 따라 조서가 조작됐습니다. 동네 어디를 잘 가고 동네 누구와 자주 만났다는 증언이 해당 장소에서 해당인들에게 유신을 비방하는 이야기를 했다는 내용으로 둔갑하는 식이었다고 합니다.  조사 장소와 일시가 허위로 기재된 경우도 이었습니다.

    재판 과정도 공정하지 못하였습니다. 무죄 입증을 위한 변호인들의 증인 신청은 한 건도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하재완이 고문당한 사실을 진술하자 문모 검사가 "이 자식 아직 덜 맞아서 정신을 차리지 못했구나"라고 협박하기도 했습니다. 피고인 임구호가 법정에서 혐의를 부인한 뒤 밖으로 끌려나가 집단구타를 당한 일도 있었습니다.

    사형장 최후진술 형태로 이뤄진 유언마저 조작됐다고 합니다. 당시 사형집행명령부에는 도예종이 "조국이 하루속히 적화통일 되기를 바랄 뿐이다"라고 했다고 기록됐습니다. 하지만 교도관 김 모 씨는 도예종이 "적화통일"이란 표현을 한 일 없고 "통일을 못 보고 죽는 것이 억울하다"라고 말했다고 증언했습니다.

    2차 인혁당 사건에 대한 법원 재심은 2006년 3월 시작됐습니다.  사건 32년 만인 2007년 1월 서울중앙지방법원은 이 사건으로 사형 선고된 8명에게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이어 2007년 8월 서울지법은 인혁당 재건위 유족과 생존 피해자가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245억 원의 배상액과 30년의 이자를 합쳐 총 600억 원의 배상액을 지급하라는 판결을 내렸습니다. 유족과 생존 피해자는 2008년 정부로부터 490억 원의 배상금을 가지급받고 이 중 일부로 4·9 통일평화재단을 설립했습니다. 이후 2010년 1기 진실화해위는 1차 인혁당 사건에 대해서도 수사과정에서 불법구금, 가혹행위, 사건조작이 있었다는 조사결과를 발표합니다. 여기에는 피고인들이 당시 법정에서 '정세에 대해 의견을 교환하는 서클 활동을 한 것은 사실이나 인혁당을 창당하려 한 적은 없다'라고 진술한 내용이 있습니다. 2015년 5월 대법원은 1차 인민혁명당 피해자들에게도 무죄 확정 판결을 내리게 됩니다.

    하지만  2011년 대법원은 2차 인혁당 사건 피해자에 대한 배상 판결을 뒤집어 이자 발생 시점을 형 확정일인 1975년 4월 9일이 아니라 손해배상 소송의 변론 종결일인 2009년 11월 13일로 바꾸어 버립니다. 34년분의 이자가 깎인 것입니다. 이로 인해 유족과 생존자는 배상액 중 211억 원을 도로 내놓아야 하는 처지가 되어 버립니다. 박근혜 정부가 들어선 직후인 2013년 7월 국가정보원은 다시 한번 인혁당 재건위 사건 피해자를 상대로 16건의 부당이득 반환 청구 소송을 합니다.

    법원은 매번 국정원의 손을 들어주게 되고, 패소한 피해자들에게는 연 20%의 높은 연체 이자율이 적용되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재산을 압류당했거나 배상금을 넘는 반환금을 내야 할 처지에 놓인 피해자도 있습니다. 법원의 2차 인혁당 사건 피해자 배상금 반환 판결에 대해 박지원 국정원장은 인사청문회 당시 "굉장히 잘못된 판결"이라고 했지만, 국정원은 배임죄 적용 소지를 이유로 부당이득 반환 입장을 바꾸지 않고 있습니다. 국가기관의 어정쩡한 입장 탓에 2차 인혁당 사건의 피해가 여전히 사그라들지 않고 있는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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