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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이야기

4.19혁명, 진정한 민주주의의 시작-자랑스런 역사

by 별별인 2023. 4.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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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정부수립 후 사사오입 개헌까지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 당시 제정된 제헌 헌법에 따르면 대통령의 임기는 4년이고 중임이 가능했습니다. 대통령의 선출은 국회에서 국회의원들이 선출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따라서 1952년 제2대 대통령 선거는 국회에서 치러야 했습니다.  이승만은 대통령을 더 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국회의 신임을 잃은 이승만은 자신의 권력을 연장하기 위해 무리수를 둡니다.  개헌을 통해 국민이 직접 대통령을 뽑은 '직선제'로 바꾸고 싶었습니다.  직선제가 되면 정부조직과 경찰, 관변단체, 청년단체, 반공단체등을 이용해서 선거에 개입이 가능하다는 계산이었습니다.  하지만 개헌을 위해서는 국회에서 이루어져야 했고, 국회는 이승만을 불신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이승만은 1952년 5월 25일 임시 수도인 부산일대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무력을 동원합니다.  헌병대를 동원하여 이승만에게 비판적인 국회의원들을 국제공산당이라는 협의로 체포하기 시작합니다.  '부산 정치 파동'이 일어난 것입니다. 

    군을 동원한 이승만의 무력 앞에 국회는 굴복하였습니다. 결국 1952년 7월 4일 국회는 거의 만장일치로 개헌을 합니다. 주요 내용은 이승만 정부가 요구한 개헌안에서 직선제 부분과 많은 국회의원들이 요구한 내각제 개헌안에서 일부분만 발췌해서 새로운 개헌안을 만들어 통과시킵니다. 1차 헌법개정인 '발췌개헌'이었습니다.  

    결국 1952년 8월에 치러진 2대 대통령 선거는 직선제로 온갖 관권선거를 통해서 이승만이 손쉽게 재선에 성공합니다.  하지만 이승만의 권력욕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1956년 제3대 대통령 선거가 다가오자 이승만은 헌법을 다시 개정하여 4년 중임을 넘어서 평생을 대통령을 하고 싶었습니다. 

    개헌을 위해 1954년 5월에 치러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경찰과 공무원 등을 총동원하고, 금품 살포와 부정선거등을 자행해 여당인 자유당 후보들을 국회의원에 대거 당선시킵니다. 헌법 개정에 필요한 제적의원의 3분의 2를 확보한 자유당은  초대대통령에 한해선 3선 금지 조항을 적용하지 않는 것을 핵심으로 하는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합니다. 

    1954년 11월 27일 국회에서 이 개헌안에 대한 표결이 이루어졌습니다. 재적 203명 중 찬성 135표, 반대 60표, 기권 7표, 결석 1표가 나왔습니다.  개헌안이 통과하기 위해서는 제적의원의 3분의 2인 136표의 찬성이 필요합니다. 찬성이 135표로 부결되었습니다.  그런데 부결선포 다음날 정부는 203명의 3분의 2는 135명이라고 우기며 가결되었다고 주장합니다. 203의 3분의 2는 135.333.... 이므로 반올림하면 135가 된다는 궤변을 늘어놓은 것입니다. 결국 다음날인 11월 29일 자유당 단독으로 국회를 열어서 개헌안의 가결을 다시 선포합니다.  유명한 사사오입 개헌입니다. 

    이 결과 이승만은 종신대통령이 될 수 있는 길을 열었습니다. 

 

1. 진보당 사건

    이승만은 1951년 12월 자유당을 만든 후 자신의 정치적인 적이 될 만한 싹들은 여당이라 하더라도 제거해 왔습니다.  자유당 창당의 공신이었던 이범석이 이끄는 민족청년단 세력을 1953년 이후 완전히 배제시켜 버리고, 친일관료출신들을 중심으로 여당을 운영하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이기붕이 새로운 지도자로 급부상합니다. 이기붕은 이범석과 달리 정치적 야심이 적고 온순하여 이승만에게 위협이 되지 못하였습니다.  이기붕의 친아들인 이강석이 이승만의 양자로 들어가면서 두 사람은 개인적으로도 더욱 가까워졌습니다.

   반면 야당은 사사오입 개헌 이우호 이승만 정부의 독재를 막기 위해 힘을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진보적인 정치인 조봉암의 참여를 두고 2개로 나뉘게 됩니다.  1955년 조봉암의 참여를 반대하는 세력이 민주당을 창당하고 이듬해 1956년 조봉암을 중심으로 진보당이 창당합니다. 

     정계개편 후 1956년 정부통령선거는 매우 치열하였습니다.  민주당에서는 대통령후보로 신익희가, 진보당 쪽에서는 대통령 후보에 조봉암이 추대됩니다. 이들이 이승만에 맞서 인상적인 선거운동을 합니다. 민주당에서 이때 나온 구호가  "못 살겠다. 갈아보자"입니다.  상당히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진보당은 평화통일론을 주장하여 큰 주목을 받습니다.  그런데 5월 5일 선거를 열흘 앞두고 민주당의 신익희 후보가 갑자기 심장마비로 돌연사하는 일이 발생합니다. 이로 인해 야당의 대통령 후보는 조봉암만 남게 되고, 당시 자유당만큼이나 보수적이던 민주당은 조봉암에 대한 지지를 하지 않게 됩니다.  하여 1956년 5월 15일 정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은 조봉암을 이기고 다시 대통령에 당선됩니다.  당시 선거에서는 세상을 떠난 신익희를 추모하는 의미로 무효표도 많이 나왔다고 합니다. 거기다가 조봉암은 이 선거를 "투표에 이기고 개표에 진 선거"라는 표현을 할 만 큼 부정이 심했다고 합니다. 이 일을 계기로 조봉암은 이승만의 최대 정적이 됩니다. 

    이 일 이후로 이승만은 1958년 1월 12일 조봉암을 간첩혐의로 체포하고, 진보당을 해산시켜 버립니다. 조봉암이 간첩이라는 증거가 없었음에도 그를 1959년 7월 31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을 시켜버립니다.   독재정권이 반공이데올로기를 이용하여 자신의 경쟁자를 빨갱이로 몰아서 죽여버리는 전형적인 사건이 됩니다. 

    한편 부통령 선거에서는 민주당 장면 후보가 근소한 차이로 자유당 이기붕 후보를 이겨 버립니다.  당시 부통령은 대통령 유고시 대통령직을 승계할 권리가 있습니다. 1956년 당시 만 81세였던 이승만의 나이를 생각하면 자유당 입장에서는 난처한 일이었습니다. 혹시라도 대통령 임기 중 이승만이 사망한다면 정권이 고스란히 민주당으로 넘어갈 판이었습니다. 

    자유당은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재적 3분의 2 이상의 의석을 확보하여 부통령이 대통령 승계를 막는 내용으로 개헌을 추진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선거에서 자유당이 참패하는 바람에 개헌은 불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자유당으로서는 이제 1960년 정부통령 선거에서 대통령과 부통령을 반드시 승리해야만 하였습니다. 1960년 만 85세가 되는 이승만의 나이를 고려할 때 자유당에게는 절실한 사안이 되었습니다.

  

2. 3.15 부정선거

    1960년 3월 15일  정부통령 선거가 실시되었습니다.  자유당은 대통령에 이승만, 부통령에 이기붕 후보를 선출합니다. 민심은 자유당과 이승만에 대해서 전보다 훨씬 악화돼 있었습니다. 점점 심해지는 독재와 부패와 함께. 경제 성장률까지 곤두박질치고 있었습니다. 1957년 9%의 성장률이 1959년 5%, 1960년 2%로 떨어졌습니다. 국민들의 민주주의의 이상적 가치를 가르치는 교육이 늘어났습니다. 비민주적인 현실을 폭로하는 언론도 발전하면서, 사회 전반에서 민주주의 의식과 정치현실에 대한 비판의식이 날로 높아졌습니다. 

    한편 야당인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였던 조병옥이 선거 한 달 전에 지병으로 사망하면서 대통령은 이승만의 당선이 확실해졌습니다. 반면 부통령 선거에서는 이기붕이 전직 부통령이던 장면을 이기는 것이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하여 이승만 정부는 최대의 부정선거를 자행합니다. 1960년 3월 15일 3.15 부정선거입니다. 

   3인조, 9인조, 공개투표와 유권자 명부 조작을 통한 40% 사전투표와 정치깡패 경찰, 공무원, 자유당원등을 동원한 총체적인 선거부정이 자행됩니다. 

    결국 유권자의 약 85%의 지지로 이승만이, 70%가 넘는 지지로 이기붕이 각각 대통령과 부통령에 당선됩니다. 하지만 이 선거 결과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많지 않았습니다.  3.15 부정선거에 분노한 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뛰어나오기 시작합니다. 

 

3.4.19 혁명의 진행과정

    최초의 시작은 대구였습니다. 1960년 2월 28일 일요일이었음에도 대구에서 열린 민주당 유세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학생들을 강제 등교를 시켜버립니다.  이에 대구지역 고등학생들은 "학원을 정치도구화하지 말라"등의 구호를 외시며 시위를 합니다. 

    선거당일에는 마산광주 등지에서 부정선거 규탄시위가 발생합니다. 특히 마산에서는 민주당에서 선거무효를 선언하며 시위를 벌였고, 여기에 많은 시민이 동참합니다.  학생중심의 평온한 낮 시위는 밤이 되면서 도시빈민이 대거 결합한 격렬한 시위로 변해버렸고, 이때 경찰이 시위대에 총과 최루탄을 무차별 발사해 8명이 사망하고 80여 명의 중상자가 발생합니다.  이를 제1차 마산항쟁이라고 합니다. 

    제1차 마산항쟁 이후 전국각지에서 중고등학생 중심으로 시위가 계속 발생합니다.  그 과정에서 4월 11일 오전, 마산 앞바다에 제1차 마산항생에 실종됐던 고등학생 김주열의 시신이 발견됩니다.  발견당시 김주열의 눈에서 뒤통수까지 최루탄이 관통된 상태였습니다. 이 소식이 마산시민들에게 전해지면서 마산에서는 대규모 시위가 일어나 4월 13일까지 계속됩니다. 제2차 마산항쟁입니다.

    김주열사건과 제2차 마산항쟁을 계기로 시위는 전국으로 급속히 확산되었습니다. 특히 4월 18일부터는 서울지역 대학생들이 시위에 앞장서기 시작합니다. 4월 18일 고려대학교 학생 3000여 명은 교내에서 집회를 하고 거리로 진출합니다. 이때 이승만 정부와 결탁된 정치깡패 100여 명이 시위를 마치고 돌아가는 고려대학교 학생들을 습격해 폭행했고, 이에 많은 학생들이 피를 흘리며 거리에 쓰러졌습니다.

    부정선거, 김주열의 죽음, 고려대학교 학생 습격등에 분노한 학생, 시민들은 4월 19일 대규모 시위를 합니다. 서울에서만 10만여 명이 참여하였습니다.  시위대가 경무대(청와대)로 향하자 경찰이 발포를 시작했고, 야간까지 서울 곳곳에서 유혈사태가 발생합니다.  부산, 광주등에서도 격렬한 시위와 경찰의 발포가 있었다고 합니다.

    4월 19일 시위로 경찰 4명을 포함해 모두 115명이 사망하고 1000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부상당했다고 합니다. 4월 19일 오후 서울 부산 광주를 비롯하여 몇몇 도시에 비상계엄령이 선포되면서 시위는 진정되는 듯 보였습니다만, 4월 25일 전국 대학교 교수 258명이 서울대학교에 모여 이승만 퇴진을 요구하는 시국선언문을 발표한 후 "학생의 피에 보답하라"라고 쓴 플래카드를 들고 다시 시위가 재개되었습니다. 이후로 시위의 성격이 부정선거 규탄에서 "이승만의 하야"로 바뀌게 됩니다. 

    4월 26일부터는 아침부터 학생과 시민들이 거리로 나오기 시작하였고, 순식간에 10만 명이 넘는 시위대는 서울 시내를 가득 메우면서 이승만의 퇴진을 요구하였습니다.  이승만을 지지하던 미국도 한국의 안정을 위해 이승만의 지지를 철회하게 됩니다.  결국 4월 26일 오전 이승만은 미국 대사와 시민 대표들을 만난 뒤, 하야 성명을 발표합니다. 

   

4.4월 혁명 

    근대국가 수립 이후 국민의 힘으로 독재권력을 무너뜨린 최초의 혁명인 4.19 혁명은 이후 한국의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국민이 다시 일어나 불의와 싸워 이길 수 있다는 경험을 하게 만든 소중한 유산입니다.  세계 어떤 나라에서도 독재권력을 3번이나 국민의 힘으로 무너뜨린 나라는 없습니다.  60년 4월 혁명, 87년 혁명, 촛불혁명. 자랑스러운 민주주의 역사의 시작점이 되는 4월 혁명은 비록 1961년 516 쿠데타로 인해서 그 과업을 완수하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고는 있지만, 한국 민주주의의 자랑스러운 역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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