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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이야기

제주 4.3항쟁, 잠들지 않는 남도 비극의 땅 제주도

by 별별인 2023. 4.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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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주 4.3 항쟁의 발생배경과 전개과정

      1947년 3월 1일 발포 사건으로부터 시작해, 1948년 4월 3일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약 7년여 동안 제주도는 붉은 피로 물들었습니다. 여기저기서 총성이 들려오고 평화로운 마을은 불길에 휩싸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지만 장례식도 제대로 치룰 수 없었습니다. 도대체 제주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요? 제주에서 일어난 비극, 제주 4·3 사건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한 우리 국민들은 새로운 정부를 세우려는 희망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희망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미국과 소련이 대립하는 가운데에 38도선을 기준으로 한반도 남쪽은 미군이, 북쪽은 소련군이 통치하기 시작했습니다. 또 미국과 소련은 조전의 정부 수립을 놓고 생각이 나뉘게 됩니다. 한반도 남쪽을 미군이 통치하는 미군정이 실시되자 제주도민들은 이제 세상이 바뀔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미군정은 조선 총독부의 경찰 기구를 그대로 두고 친일파 경찰들을 통치에 이용했습니다. 그러자 제주도민들의 실망감은 커졌습니다. 게다가 극심한 가뭄으로 식량이 부족하고, 전염병까지 돌아 제주도민들은 힘겨운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1947년 3월 1일, 제주의 북초등학교에서 3·1절을 기념하는 집회가 열렸습니다. 제주도민들은 다음과 같은 주장을 했습니다. “3·1 정신을 이어받아 통일 국가를 세우자!” “친일 경찰 물러가라! 식량 문제는 우리 손으로!” 평화롭게 진행된 거리 행진이 끝나갈 무렵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어린아이가 경찰의 말발굽에 치여 넘어졌습니다. 그런데 경찰은 사과조차 하지 않고 가버렸습니다. 이에 화가 난 제주도민들은 경찰서로 몰려가 거세가 항의했습니다. 경찰은 이를 폭동으로 간주했고, 제주 중심지에 있는 관덕정 부근에서 무차별적으로 총을 쏘아댔습니다.  이때 6명이 죽고, 8명이 다치게 됩니다. 이 3·1절 발포 사건에 제주도민들의 분노는 하늘을 찌를 듯했습니다.  3월 10일, 제주도 직장인들 약 4만여 명이 참여한 총파업이 벌어지게 됩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육지 경찰과 북에서 내려온 청년단체인 서북청년회가 제주도로 들어오게 됩니다. 지금까지 벌어진 일들이 모두 공산주의자들이 선동한 일이라며 이들을 찾아낸다는 이유에였습니다.  

    그러던 중 유엔(UN)에서 선거가 가능한 지역에서만이라도 총선거를 실시할 것을 결의하면서, 남한만의 총선거 실시가 결정되었습니다. 그러자 1948년 4월 3일, 한라산 오름에서 봉화불이 타올랐습니다. 남한만의 총선거를 반대하는 청년들이 중심이 되어 무장봉기를 일으켰습니다. 이들 무장대는 경찰서를 습격하고 서북청년회를 공격했습니다. 이에 맞서 미군정은 경찰과 서북청년회를 이용해 진압하기 시작했습니다. 육지의 군인들도 제주도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여순지역의 군인들은 제주도에서의 진압에 반대하여 항명을 하기도 했습니다.

     무장대와 미군정 사이에 평화 협상이 진행되었으나 제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1948년 5월 10일, 남한만의 총선거가 실시되었습니다. 한반도를 분단된 나라로 만들 수 없다는 생각에서 많은 수의 제주도민들이 투표에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제주도 두 곳 투표구에서 투표자가 과반수를 넘지 못해 무효 처리되었습니다.  초대 대통령이 된 이승만은 남한만의 총선거를 반대한 제주도민들을 사회주의 세력으로 간주하고 대대적인 토벌 작전을 펼치기 시작했습니다.  더 많은 경찰과 군인들이 투입되었고, 무장대를 무조건 토벌하라는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여기에 1948년 11월, 정부는 제주도에 계엄령을 선포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을 한꺼번에 죽이는 집단 학살이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토벌대의 대장으로 임명되었던 9 연대장 박진경 중령은 "우리나라의 독립을 방해하는 제주도 폭동사건을 진압하기 위해서라면 제주도민 30만 명을 희생시켜도 무방하다"라는 말을 합니다. 그리고  “해안선으로부터 5km 이상 중산간 마을에 남아 있는 사람들을 모두 폭도로 간주하여 총살하겠다.” 는 내용을 담은 포고문을 발표합니다. 또한 한라산 중산간 마을 사람들에게 해안가로 내려오라는 명령(소개령)을 내립니다. 그런 뒤 토벌대는 한라산 중산간 지역 마을을 불태우기 시작했습니다.  중산간 지역 마을 대부분이 잿더미로 변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한라산에 올라간 무장대를 도왔다며 제주도민들을 이유 없이 죽이기도 했습니다. 한편 한라산에서 내려오면 살려주겠다는 토벌대의 말에 1만여 명이 내려왔지만 그중 1,600여 명의 사람들이 총살당하고, 형무소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어른들뿐만 아니라 많은 어린이들도 죽어갔습니다. 토벌대뿐만 아니라 무장 대들도 경찰 가족 등을 이유 없이 죽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 속에서도 용기 있게 저항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문형순 전 성산포 경찰서장 등입니다. 당시 경찰들은 군인, 서북청년회와 함께 무장대를 토벌하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문형순은 명령을 거부했습니다. “제주도민을 함부로 잡아들일 수 없소. 그들을 왜 함부로 죽인단 말이요. 부당한 명령을 따를 수 없소.” 문형순과 같이 정의를 지키려는 사람들 덕분에 제주도민들은 어느 정도 생명을 지켜낼 수 있었습니다.  화북 어느 마을 사람들은 군인들에 의해 불타버린 서쪽 바닷가의 곤을동 마을 사람들에게 집을 짓고 살 땅을 나누어 주기도 했다고 합니다. 견디기 힘든 어려움 속에서도 ‘인간다움’을 지켜내려는 사람들 덕분에 제주도 사람들은 희망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제주 4·3 사건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습니다. 제주도 인구의 10분의 1 정도인 2만 5천 명~3만여 명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대부분이 민간인이었습니다. 1954년 9월이 되어서야 7년여 만에 제주도 사람들은 한라산에 올라갈 수 있게 되었고, 제주도에서 총소리도 멈추었습니다.

 

2. 제주 4.3 항쟁과 학살의 흔적들

    제주 4·3 사건은 오랫동안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제주도민들은 혹여 잘못 이야기했다간 자신들도 폭도나 폭도의 가족으로 몰려 피해를 입게 될까 봐 꽁꽁 숨겨왔습니다. 제주도민들은 그렇게 깊은 아픔을 가슴에 안고 50여 년의 세월을 살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진실을 알리기 위한 노력을 벌여왔습니다. 그런 노력 덕에 2000년 김대중 정부 때에는 ‘4·3 특별법’이 만들어지고, ‘제주 4·3 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가 설치되어 정부 차원의 진상 조사가 시작되었습니다.  2003년 노무현 정부 시기에는 대통령이 직접 제주도에 내려와 정부 차원에서 처음으로 공식적인 사과를 했습니다. 국가 폭력에 의해 수많은 제주도민들이 억울한 죽음을 당했음을 인정한 것입니다. 이후 제주 4·3 사건 당시 희생당한 분들의 넋을 달래고, 평화와 인권의 가치를 되새기기 위해 제주 4·3 평화공원이 만들어지고, 기념관도 세워졌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제주 4·3 사건은 그 진실이 제대로 알려지지 못한 부분이 있습니다.  또 죄 없이 희생당한 분들에 대한 보상 및 명예 회복 등 여러 가지 해결해야 할 문제도 남아 있습니다.  지금부터 제주 4·3 사건의 유적지를 돌아보며 제주의 아픔이 무엇인지 알아보고, 아픔을 넘어 무엇을 기억하고 기념해야 할지 생각해 볼까요? 또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어떤 노력이 필요한지도 살펴보아야겠습니다.

관덕정

     3·1절 발포 사건이 일어난 관덕정 : 제주 4·3 사건은 3·1절 발포 사건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어린아이가 경찰의 말발굽에 치였는데 사과도 하지 않자, 제주도민들이 경찰서로 몰려가 사과를 요구했습니다. 그러자 경찰은 이를 폭동으로 여겨 관덕정 앞에서 총을 쏘아댔습니다. 경찰이 쏜 총에 제주도민들이 죽거나 다쳤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다음 날부터 3·1절 행사를 주관했던 사람들과 학생들을 잡아가 고문까지 했다고 합니다. 이 소식이 전해지면서 제주도민들은 분노했고, 총파업을 결정했습니다. 관덕정은 세종 때 만들어진 정자로 이곳에서는 잔치 등 여러 가지 행사가 열리기도 했었습니다. 제주 4·3 사건 당시 무장대 사령관이었던 이덕구의 시신을 관덕정 앞 십자가 형틀에 걸어 며칠 동안 전시했다고 합니다. 

다랑쉬 오름

     다랑쉬 굴 : 제주 4·3 사건 당시 수많은 사람들이 끔찍하게 죽어간 흔적들이 곳곳에 남아 있습니다. 다랑쉬 오름에 있는 다랑쉬 굴도 그중 하나입니다.  다랑쉬 오름 부근에 있던 다랑쉬 마을이 불태워지자, 마을 사람들은 다랑쉬 굴로 숨어들었습니다. 굴 입구를 커다란 돌로 막고 흙으로 덮어 눈에 띄지 않게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토벌대들에 의해 발각되면서 끔찍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토벌대들이 동굴 입구에서 불을 피우는 바람에 굴 안에 숨어있던 11명이 질식해 죽었다고 합니다. 4·3 사건 진상 조사가 이루어지면서 다랑쉬 굴에서 11구의 유골이 발견되었답니다. 

 

너븐숭이 애기무덤 과 너븐숭이 43 기념관

     북촌리 마을 : 제주 4·3 사건 당시 가장 큰 피해를 입었던 마을이 있습니다. 바로 제주 서쪽 해안가에 위치한 조천읍의 북촌리 마을입니다.  당시 이 마을 남자들이 거의 죽음을 당해 ‘무남촌’으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어려움 속에서도 제주 4·3 사건의 진실을 알린 『순이 삼촌』이란 소설에서도 북촌리 마을의 비극을 다루고 있습니다. 북촌리에는 당시의 비극을 알려주는 너븐숭이 기념관이 있습니다. 너븐숭이는 ‘넓은 돌밭’을 뜻하는 말입니다. 도대체 이 마을에서는 어떤 일들이 있었던 것일까요?

    1949년 1월 17일, 북촌리 너븐숭이 근방에서 행군하던 군인 2명이 무장대의 습격을 받아 죽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러자 군인과 경찰 토벌대가 북촌리로 들이닥쳤습니다. 그리고는 마을 사람들을 모두 학교 운동장으로 모이게 한 뒤 마을에 불을 질렀습니다. 운동장에 모인 마을 사람들을 향해 토벌대가 소리쳤습니다. “군인과 경찰 가족은 서쪽으로 나와!” 그런 뒤 나머지 사람들을 학교 주변의 당팟과 옴팡 밭(오목하게 쏙 들어가 있는 밭)으로 끌고 가 총질을 해댔습니다. 여기저기서 살려달라는 울음소리가 들렸지만 총소리는 끊이질 않았습니다. 그날 하루 300여 명의 마을 사람들이 죽임을 당하는 비극이 벌어졌습니다.  밭은 온통 핏빛으로 물들고, 시체들이 널려 있는 모습이 마치 무를 뽑아 널어놓은 모습과 같았다고 합니다. 북촌리 마을은 제삿날이 거의 똑같습니다.  매년 1월 16일이 되면 합동 제사를 지내며 억울하게 죽어간 사람들의 혼을 날래고 있습니다. 너븐숭이 4·3 기념관 옆에는 마을 사람들의 혼을 달래는 위령탑이 서 있습니다.

 

섯알오름 학살터

    섯알오름 학살터.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예비검속으로 잡혀온 대정, 한림지역 주민 2백12명 이상을 재판도 없이 즉결처분으로 총살한 후 암매장한 장소입니다.  제주지구 계엄사령부(사령관 신현준 해병 대령)의 지시에 의해 저질러진 반인륜적인 양민학살로 희생된 시신은 6년 8개월 만에야 누가 누군지 모르는 한 줌의 뼈로 유족에게 돌아올 수 있었다고 합니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정부는 즉각 '전국 요시찰인 단속 및 전국 형무소 경비의 건'과 '불순분자 구속 처리의 건' 등의 치안국 통첩을 각 도 경찰국에 하달하여 보도연맹원 및 요시찰인물에 대한 검속을 단행하였습니다. 이는 이전의 4·3과 구분하여 제주에서는 '예비검속' 혹은 '재검 속'이라 불려지고 있으며, 한국전쟁 시기에도 제주에서는 4·3이 계속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기도 했습니다.    섯알오름 학살터는 일본군이 1944년 말부터 알뜨르지역을 군사요새화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일본군 탄약고 터입니다. 당시 일본군은 야트막한 섯알오름의 내부를 전부 파내어 그 내부를 탄약고로 사용했으며, 탄약고 위쪽 오름 정상 부근에는 두 개의 고각포 진지를 만들었습니다. 이 탄약고 터는 1945년 일제가 패망하면서 미군에 의해 폭파됩니다. 이때 오름의 절반이 함몰되면서 큰 구덩이가 만들어졌습니다. 폭탄고가 폭파될 때 고각포 진지 하나도 같이 폭파되어 사라져 버렸습니다. 섯알오름 학살터의 큰 구덩이는 1950년 8월 20일 새벽 모슬포 경찰서 관내 예비검속자를 집단학살하는데 이용됩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계엄당국은 전국적으로 보도연맹에 가입됐던 사람들을 체포하기 시작합니다. 이때 제주지구계엄당국에서도 4개 경찰서의 집행하에 8백20명 이상의 주민을 검속 하게 됩니다.. 당시 모슬포 경찰서 관내 한림, 한경, 대정, 안덕 등지에서도 3백47명이 검속 됐는데, 이들 중 60명은 1950년 7월 16일 군에 인계되어 집단 학살됩니다.

      이어 8월 20일 새벽 송악산 섯알오름의 일제강점기 탄약고 터에서 비극적인 집단학살이 자행되었습니다. 이날 한림지서에 검속 되었던 63명도 전날 저녁 대정지역으로 옮겨져서 새벽 2시경에 먼저 학살당했으며, 대정읍 상모리 절간고구마 창고에 수감되었던 1백32명은 두 시간쯤 지난 새벽 5시쯤에 학살되고 만 것입니다.

      칠석날, 모슬포 주둔 계엄부대인 해병 3대대 김윤근 소령의 지휘하에 집단으로 총살됨으로써 그 모진 4·3의 광풍에도 살아난 게 덧없는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승만 정부가 부산으로 옮겨진(8월 18일) 바로 직후였습니다. 이날 모슬포 해병부대는 아침 기상나팔이 없었으며 학살에 참가한 해병 기간병들은 총을 침대에 던진 채 멍한 표정으로 드러누웠다고 제주출신 해병 3기 훈련병들은 증언했습니다. "희생자들은 그날 새벽 트럭을 타고 인가가 없는 바다 쪽 길로 빠질 때 죽음을 예감했나 봅니다. 그들은 신고 있던 신발과 옷가지들을 길가에 던졌습니다." 날이 밝으면 그들의 억울한 죽음을 증언해 달라는 뜻임을 양신하 유족은 알게 되었다고 한다

 

 

     하귀리의 영모원 :  4·3 사건 당시 같은 마을 사람들끼리도 서로가 등을 돌리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하귀리가 바로 그런 마을 중 하나입니다. 마을 사람들은 밤에는 무장대를 도와주고 낮에는 토벌대에 협조했습니다. 무장대에 의해 죽는 사람도 생기고, 많은 이들이 토벌대에 의해 죽임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상황이 되니 마을 사람들끼리 서로 갈등이 생겼습니다. 4·3 사건이 끝난 이후 이 마을은 무장대를 도운 사람이 많다며 ‘빨갱이 마을’로 불렸습니다. 마을 사람들 중에는 자신도 빨갱이 가족으로 몰릴까 봐 두려움에 떨었고, 무장대와 관련 있던 사람들을 멀리했습니다. 결국 하귀리가 동귀리와 귀일리로 나뉘었습니다. 그렇게 나뉘어 서로를 멀리하며 꽤 오랜 시간을 보내왔습니다. 하지만 잘 생각해 보면, 이들은 모두 피해자입니다. 서로를 멀리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마을 사람들도 이를 깨달아 서로가 다시 하나 되려는 노력을 했습니다. 마을에 영모원이라는 추모 공간도 만들었습니다. 영모원에 있는 4·3 희생자 위령비에는 다음 내용이 적혀 있습니다. "지난 세월을 돌아보면 모두가 희생자이기에 모두가 용서한다는 뜻으로 모두가 함께 이 빗돌을 세우나니 죽은 이는 부디 눈을 감고 산자들은 서로 손을 잡으라. 이제야 비로소 지극한 슬픔의 땅에 지극한 눈물로 지극한 화해의 말을 새기나니, 지난 50여 년이 길고 한스러워도 앞으로 올 날들이 더 길고 밝을 것을 믿기로 하자. 그러니 이 돌 앞에서 더 이상 원도 한도 말하지 말자. 다만 섬나라 이 땅에 태어난 이들은 모두 한 번쯤 여기 와서 고개를 숙이라". - 비문 내용 중 일부 - 이 비는 제주의 민간인뿐만 아니라, 무장대와 토벌대 모두를 추모하기 위해 세운 것입니다. ‘모두 희생자이기에 모두 용서한다.’는 마음을 담아 비를 세우고, 화해하며 함께 살아가기 위한 발걸음을 내딛게 되었답니다.

 

무명천 할머니에 대한 동화책

      역사 속 작은 이야기: 무명천 할머니 제주도 한림읍 월령리에는 진아영 할머니가 살고 있었어요. 그녀는 얼굴을 무명천으로 감싸고 50여 년을 살아왔기에 무명천 할머니로 불렸습니다. 그녀는 왜 얼굴을 무명천으로 감싸고 살아야 했을까요? 그 이유는 제주 4·3 사건 때문입니다. 제주도의 평화로운 작은 마을에 살고 있었던 할머니는 총탄에 맞아 턱을 잃고 말았습니다. 턱을 잃은 후 할머니는 말하기도 힘들었고 음식을 먹으면 모두 흘리기 일쑤였습니다. 그 모습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싫었던 할머니는 식사도 항상 혼자 했습니다.  이웃에 놀러 가 커피 대접을 받아도 밖에서 마시고 들어왔다고 했습니다. 무명천 할머니는 제대로 씹지 못하니 늘 소화불량에 시달렸습니다. 총탄에 맞은 후유증으로 이곳저곳 아픈 곳도 많았습니다. 링거를 맞지 않고는 제대로 생활하기 힘들었고, 진통제 없이는 쉽게 잠들지 못했다고 합니다. 약값과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 이웃 일을 도와주거나, 톳을 따 내다 팔았습니다. 또 마당에 심어 놓은 선인장 열매를 팔아 수입을 마련하기도 했습니다. 죽기보다 힘든 삶의 고통을 안고 외롭게 살아가던 할머니는 2004년 9월 8일 9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할머니의 삶터를 찾아오고 있습니다. 돌담 아래 쭈그리고 앉아 누군가를 기다리던 무명천 할머니의 아픔을 조금이라도 느끼고, 제주 4·3 사건의 진실을 기억하기 위해서입니다. 아직도 평화의 섬으로 지정된 제주의 아픈 역사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진실이 제대로 알려지기 시작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으니까요. 

  아픈 역사는 잊는 것이 아니라 항상 기억하고 되풀이되지 않도록 노력해야 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직도 정리되지 않은 역사를 기억하고 올해도 4.3일을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현대사의 아픈 부분들은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고 추모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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